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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예하부대 최초 군인교회 -독립5대대교회, 석도교회

Kenny 2024-03-12 6개월전
ㅇ해병대 독립 제5대대교회

해병대 독립 제5대대교회는 해병대사령부교회 다음으로 설립된 최초의 전방 군인교회였다. 당시 제5대대는 인천과 김포지구에 주둔하면서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후퇴한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 교회는 당시 정훈장교였던 반병섭 소위에 의해 창설되었다. 그는 1951년 2월 하순부터 이곳에 부임하여 정훈업무를 맡고 있었다. 1951년 4월 5일 해병대사령부로부터 반병섭 소위에게 정훈업무와 병행하여 군목업무를 수행하라는 전문 지시가 하달되었다. 그는 말씀의 봉사자가 되겠다는 사명감이 있었고, 이를 위해 그는 당시 해군 군목실장의 초청서를 갖고 있었으며, 해병대사령부에서는 이미 목사안수를 받은 그에게 군목 발령을 약속했다. 그는 전문 ㅑ지시에 따라 곧바로 군목업무를 시작했다. 이 시기는 아직 해병 특과 제1기 군목 후보생들이 교육을 받던 중이었으므로 반병섭 소위는 해병대 예하부대에서 가장 먼저 말씀의 기치를 든 군목업무의 기수가 되었다.

그는 교회 창설에 매진하였다.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양곡국민학교의 어느 교실을 예배장소로 지정해서 1951년 5월 6일 해병대사령관과 참모장이 참석한 가운데 100여명의 장병과 함께 창설예배를 드렸다. 산재해 있던 예하 중대의 교인들은 트럭으로 수송했다. 당시 반병섭 소위는 일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하였다.

오늘부터 예배를 창설함. 참모회의 석상에서 오(명복) 부대장은 “본부 장교는 전원, 사병은 지장이 없는 한 자유로 참석토록 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나는 그때 “부대장님, 신앙은 자유이므로 장교님도 자유로 참석토록 하시죠”했더니 부대장은 “그것은 군목의 입장이오, 부대장의 입장으로서는 예배도 부대 행사의 하나인 동시에 나의 방침”이라고 하셨다. 모든 참모들이 여기에 다른 이의를 말하지 않았다. 오명복 부대장 후임으로 부임한 이봉출 부대장은 정열과 기백에 넘친 지휘관으로서 비상한 결심으로 신자가 된 후 착실한 신앙생활로서 부하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다. 그는 드디어 1951년 10월 세례를 받게 되었으니 이는 일선 교회에서 행한 최초의 세례식이었다고 본다. 이 부대는 신앙의 지휘관들에 의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게 통솔되어 나갔다. 그래서 이 부대의 표어도 첫째, 적에게 강하자, 둘째, 백성에게 부드럽자, 셋째, 하나님께는 겸손하자였다. 이 부대는 지방교회로부터 신앙의 부대라는 별명을 받았다. 이봉출 부대장은 군목의 부재시 교인들을 직접 인솔하여 민간교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 부대에게는 하나님의 군대, 믿음의 군대란 별명이 결코 아깝지 않았다.

오명복 소령의 뒤를 이어 부대를 지휘한 이봉출 대위는 1951년 10월 세례를 받고 착실한 신앙생활로 많은 장병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다음은 반병섭 군목이 불기둥지에 게재한 군목생활의 회고에서 인용한 이봉출 대위의 글이다. 이 글을 읽어보면 이봉출 대위가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한 계기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9.28 서울수복작전에 있어서 가장 치열했던 연희고지 격전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끌었다. 격전장에서 그렇게 용감했고 이상에 불타던 전우들이 적탄에 쓰러지고 또 쓰러질 때, 비로소 이때까지의 모든 자기가 부정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전부를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까지 한번도 불러보지 못했고 불러보려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하나님을 불렀다. 나는 그로부터 마음의 가책을 느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자기에게 필요하고 급할 때는 하나님! 하나님! 하고 찾다가 그 요구가 이루어지고 평안할 때는 모른 척하는 것이다. 자기의 배반된 심리를 가책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예배가 부대에서 시작되는 그날부터 신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반병섭 목사는 민간교회와의 유대를 더욱 강화하였다. 가곡리교회와 김포교회와의 상호 협조는 늘 지속되었다. 특히 김포읍교회에서는 매주일 찬양대를 동원하여 찬양을 담당하였다. 그는 교회 밖에서도 업무를 활발히 전개하였다. 영창방문, 전투로 인해 부상 당한 입실환자 방문, 개인상담 등도 하였다. 또한 각 중대와 소대별로 도의(道義) 강연회도 실시하였다. 전방부대였으므로 그는 전사자를 위한 장례식과 추모식도 집행하였다.
그해 11월 8일 그는 진해 해병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그는 추수감사절예배를 마지막으로 후임 오봉운 군목에게 교회를 인계하였다. 그는 일기에 자신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주일예배 24회 3,750명... 월간지 「전진」, 월간지 「해병보」, 「예배주보」, 입실 환자 위문대 27대... 개인상담, 여론 조사, 가정통신, 영창 방문, 장례식, 매장식 추모회, 세례식, 성찬식, 이런 기록들이 지난 날들을 이야기 하고 있다.”


ㅇ석도교회

제5대대에 이어 교회가 세워진 곳은 서해 석도였다. 진남포 인근의 서해상에 위치한 이 섬은 해병대 도서부대의 전초기지였다. 옛날 당나라와 교역할 당시에는 군진(軍陣)의 관방(官房)이 있던 곳이었다. 6.25전쟁 전까지 공산주의 세력의 통치 아래에 있던 이 섬에는 243세대가 살고 있었는데 백령도보다 훨씬 작은 섬이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해병대 제7대대가 이곳에 주둔하여 본부를 설치하고 인접한 섬인 초도까지 병력을 파견하여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당시 이 부대의 독립 0중대 선임장교였던 신성국 중위는 조선 신학교 출신의 정훈장교였다. 그는 제5대대 반병섭 소위와 함께 임관하였고, 반 소위처럼 군목업무를 겸무하라는 전문 지시를 4월 5일에 받았다. 신성국 군목은 4월 초부터 도내 주민과 피난민을 대상으로 정훈 선무공작을 실시하면서 복음의 씨를 뿌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이 섬의 중앙지대에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섬의 곳곳에 전파되어 나갔다. 그는 피난민들이 타고 온 어선에서 건축 자재를 마련해서 군민 합동으로 교회를 신축하였다. 매주 주일예배가 계속되었고 수시 성경공부도 지속했다. 교인들은 피난민, 본토인, 군인으로 구성되었으나 피난민들이 대다수였다. 곧 이 교회는 교인이 100여 명에 달하는 규모로 부흥했다.

석도교회의 창설은 북한 공산당의 지역에서 복음의 기치를 들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신성국 군목은 이 교회를 학교교육을 위해서도 제공하였다. 그는 민사관(民事官)으로서 교회가 해야 할 많은 문화사업, 구제사업 등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는 1951년 6월 군종장교로 전과 명령을 받고 동년 8월 해군본부로 전속되었다. 그가 떠난 후 이 교회는 원주민 김기춘이 그의 뒤를 이어 석도교회를 보살피면서 복음의 싹을 트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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