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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최초의 군종목사(장교) 임관-박창번, 송창설, 이원동, 오봉운

Kenny 2024-03-12 6개월전
박창번, 송창설, 이원동, 오봉운 목사는 해병대에서 정식 장교로 임관한 최초의 군목들이다. 이들은 1953년 5월 3일 해병학교에 입교해서 1개월의 군사훈련을 마치고 모두 해병대 군목장교로 임관하였다. 목회경험을 고려해서 대위로 임관한 박창번 목사를 제외하고 모두 중위로 임관하였다. 1951년 6월 9일부로 박창번 군목과 송창설 군목은 1연대, 오봉운 군목은 포병대대, 이원동 군목은 해병학교에 각각 배치되었다. 당시는 6.25전쟁 중에 휴전협정을 앞두고 피아간 일진일퇴의 격전을 벌이던 시기였으므로, 이들은  전쟁 상황 속에서 하나님 말씀의 씨앗을 뿌렸다.


ㅇ1연대교회 창설

박창번 군목과 송창설 군목은 1연대가 난공불락의 요새인 도솔산 지구에서 전투를 감행하던 시기에 그곳으로 부임하였다. 도솔산은 38도선 이북 양구와 인제 사이에 위치한 태백산맥의 주봉이다. 이곳은 방어에는 유리하고 공격하기에는 불리한 전략적 천연 요새지였다. 적은 이곳을 확보하려고 인민군 최강부대인 제5군단 제12사단과 제32사단을 배치하였다. 세계 전사상 용맹성이 알려진 미 해병 제1사단 제5연대도 이곳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 해병 제1연대는 악전고투와 아비규환의 백병전 끝에 이 난공불락의 요새지를 함락시켰다.

제1연대에 교회를 세움으로써 전쟁터에 복음의 씨앗이 심어졌다. 당시 연대장은 신앙의 용장 김대식 대령이었다. 박창번 군목은 연대 군목실장, 송창설 군목은 보좌관이었다. 연대장과 일부 참모들의 협조와 박창번, 송창설 군목의 노력으로 연대본부에 천막교회를 세웠던 것이다. 이 교회를 ‘해성(海星)교회’라고 명명했다. 군대 교회에 특수한 명칭을 부여한 것은 민간교회의 예를 따른 것이었다. 모든 준비를 갖추고 1951년 7월 첫 주일 11시에 창설예배를 드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시각 적의 포탄이 연대본부에 쏟아져서 예배시간을 저녁으로 연기하여 창설예배를 드렸다. 이후 많은 장병들이 주일마다 이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작전을 전후한 출전예배와 귀대예배가 지속되었고, 전방부대를 위한 순회예배도 계획대로 잘 진행되었다. 전도지와 성경이 전선의 각 참호까지 전달되었다. 군목들은 개인상담은 물론 부상 장병을 위로하였으며 전사자의 장례식도 주관하였다. 박창번 군목은 8월 17일 해병대사령부 군목실장으로 부임하라는 명령을 받고 9월 초순에 1연대를 떠났다. 그 뒤를 이어 송창설 군목이 1연대의 모든 군목업무를 책임지게 되었다.

제3대대장 김윤근 소령은 점령한 도솔산 산정에서 전투의 승리를 축하하는 한편 이미 조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한 전우들을 떠올리며 기도로 격전장에서 승리했다고 말했다. 김윤근 대대장은 신앙의 사람이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전면 철수를 감행할 때 제3대대도 원산으로 철수를 했었는데, 그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기도로 타개한 그의 신앙의 모습을 당시 예하 중대장이 쓴 수기에서 엿볼 수 있다.

제3대대는 중동부전선 동양리에서 적의 대부대의 포위를 받게 되었다. 도로 교량은 전부 파괴돼서 도저히 이 포위망을 뚫을 길이 없다고 판단했고 전멸을 면치 못하는 위급한 사태였다. 미 육군 1개 탱크중대가 지원부대로 동원되었으나 무참히도 적에게 희생되었다. 온 부대가 아수라장이 되어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한 가운데 엄동설한에 눈까지 무릎 위까지 펑펑 쏟아져 내리던 그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모든 사람이 곧 닥쳐올 죽음에 대한 공포에 떨고 있는 바로 그 때, 쌓인 눈 위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김윤근 대대장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두손 모아 비는 대대장은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지만 그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마구 쏟아져 흘렀다. 수라장이 된 절망의 전쟁터에서 눈 위에 무릎을 꿇고 주님께 기도하는 대대장의 모습은 너무나도 엄숙해 보였다. 그는 필시 자신의 구원보다도 부하들의 생환을 기도하였을 것이다. 그 모습이 어찌나 거룩하게 보였는지 나도 그만 감동되어 오! 주여! 하고 무릎을 꿇었다. 우리는 얼마 후에 마전리로 이동하였는데 그 절망적인 포위망을 돌파하여 목적지로 이동하는 동안 단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무사히 철수하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기적이 아닌가? 참으로 대대장의 기도의 은혜임을 누구나 다 인정하는 사실이다.

1951년 8월 27일 1연대는 중동부 전선의 924고지 탈환 작전에 투입되었다. 924고지는 도솔산의 주봉 중의 하나로서 지근거리에 금강산이 보이는 전략적 지대였다. 이곳을 점령하면 아군이 북한 지역으로 깊숙하게 침투할 수 있는 중동부 전선의 관문이었다. 적은 이곳에 3군단 제1사단 3연대를 투입하여 방어태세를 갖추고 아군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서 그곳을 김일성 고지라고 명명하였다.

이 김일성 고지 탈환작전도 도솔산 전투에 못지 않은 치열한 격전이었다. 연대장 김대식 대령이 부상으로 후송되기까지 했다. 1연대가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을 때, 송창설 군목은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그는 하루에도 수십구씩 전사자를 매장해야만 했다. 사체처리장교의 임무를 띠고 합동묘지를 선정하여 일일이 전사자를 위해 기도하고 매장하였다. 또한 부대가 이동할 때마다 전몰장병을 위한 이별과 추모의 예배를 드렸다. 38선의 장벽이 무너져서 남과 북이 서로 왕래하게 될 먼 훗날을 위해 전사자들은 눈에 잘 띄는 장소에 묻혀졌다.

송창설 군목은 많은 전사자들의 영혼을 구원하였다. 전사자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을 안고 사망했다. 전사자들의 유물이 이를 증명한다.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치되어 있는 해병대원들의 유물 속에는 유독 성경과 쪽복음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전선에서의 벌어진 에피소드 중 하나를 소개한다. 적의 포탄이 연대본부에 쏟아질 때 모든 장병이 천막교회로 피난차 모여들었다. 어려울 때 찾아야 할 곳이 교회라는 것을 그들 모두 느낀 것이었다. 송창설 군목은 그들을 위해 위로하며 기도하고 격려해 주었다. 9월 3일 김일성 고지를 완전히 탈환하였다. 송창설 군목은 그 이후 이원동 군목이 부임하기까지 1연대 교회에서 봉사하였다. 이원동 군목은 12월 1일부로 부임하였고, 송창설 군목은 같은 날짜에 진해 해군병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 부대에 부임한 후임 연대장 공정식 중령은 인내와 신앙으로 승리하는 부대를 만들기 위해 장병들의 신앙을 권고하며 군종업무를 도왔다.
 

ㅇ해병학교교회 창설

해병학교는 6.25전쟁 중 해병대 장교 확보의 필요성에 의해 1951년 4월 1일에 창설되었다. 당시 이 학교는 진해여자중학교의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해병대의 기간이 될 장교를 교육하는 해병학교에 교회가 선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었다. 해병학교교회는 해병 특과 제1기 이원동 군목에 의해 창설되었다. 1951년 6월 9일부로 부임한 이원동 군목은 전력을 다하여 교회를 세워 나갔다. 그는 군목실을 본관 하층에 정하고 유능하고 돈독한 신앙을 가진 해병 1명과 함께 업무를 했다. 우선적으로 학교의 강당을 예배장소로 사용키로 하였으며, 1951년 6월 18일 해병학교교회 창설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 예배에는 군인과 민간인을 합하여 약 800명이 참석했다. 해병 사관후보생과 장교 및 그들의 가족, 그리고 당시 진해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과 공군의 여러 부대에서도 많이 참석하였다.

매주 주일예배를 드리는 외에도 주 2시간씩 정신교육을 하는 등 여타 군목업무에도 열정을 쏟았다. 전시 교육과정의 정신교육 시간이 군목에게 할당된 것은 좋은 현상이었다. 개인상담도 병행하였으며 부대와 사회를 연결시켜 주는 가정통신은 특히 많은 효과를 나타냈다.

이선동 군목은 해병대 신병훈련소에도 교회를 창설하였다. 당시 그는 진해에 있는 유일한 해병군목이었기 때문에 해병학교교회 주일예배가 끝나면 신병훈련소에 가서 예배를 인도했다. 당시 이선동 군목은 해군통제부군인교회도 겸무했다. 그는 12월 1일 1연대로 발령을 받기까지 쉬지 않고 말씀의 봉사자 역할을 수행했다.


ㅇ제1포병대대교회 창설

6.25전쟁으로 최전방에서 전투가 한창일 때 해병대 제1포병대대가 해병대 전투지원부대로 발족하기 시작했다. 이 부대는 진해 경화동에 주둔하면서 출전을 위해 맹렬한 교육에 임하고 있었다. 1951년 6월 9일 해병 특과 제1기 오봉운 군목이 이 부대에 부임하였다.

동년 11월 7일 포병대대는 해병대 제1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중동부 전선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각 중대가 전방 책임지역으로 전개하게 되자 오봉운 군목은 각 중대를 일일이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면서 초기 군목업무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11월 24일 제5대대로 전속되기까지 그는 전장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받들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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