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자료

본문 바로가기

사랑과 나눔 봉사회 자료실

일반자료

6.25전쟁 중 해병대 예하부대 교회의 설립과 부흥1

Kenny 2024-03-12 6개월전
ㅇ제3연대교회

- 김포부대교회
반병섭 군목에 의해 창설된 최초의 전방교회인 해병 독립 제5대대교회의 활동은 이 시기에 이르러 오봉운 군목에 의해 막이 올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1951년 11월 8일 부임해서 그 다음 해 8월 20일까지 이 교회를 섬겼다. 그해 12월에 5대대는 2대대와 진지를 교대하고 후방으로 이동했으나, 군목은 그대로 잔류해서 2대대를 위해 일했다. 그의 부임 후 2대대와 3대대가 전후방 교대를 하였으나, 그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전투단의 발족으로 독립 제5대대는 해병전투단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교회활동은 종전과 다름없이 진행되었다. 그는 곧 부대 본부에 교회를 세웠다. 이로 인해 군목업무는 더욱 활발해졌다. 교회설립 이전까지 초등학교 교실을 예배장소로 사용했으므로 불편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주일예배와 수요일 밤예배가 시행되었다. 주일 오후에는 전방 중대를 위한 방문예배를 드렸다. 수요일에는 후방 의무중대를 방문하여 환자들을 위로하고 교육하였다.

1952년 8월 20일 권수복 군목이 오봉운 군목의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총살 직전에 있던 한 탈영병을 선도하고 그의 생명을 구제하였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생명의 존엄성을 위한 노력은 그에게 가장 의미있고 보람있는 일 중의 하나였다.

인근 민간교회와 김포지구 주둔 미 해병연대와의 연합행사도 빈번하게 실시되었다. 특히 그의 노력으로 인천시의 각 기관이 합동으로 많은 성탄 위문품을 트럭에 탑재하고 부대를 위로방문한 것은 장병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반병섭 군목이 권수복 군목의 후임으로 1953년 6월 30일 다시 이곳에 부임하였다. 그의 계획성있고 적극적인 활동으로 교회는 나날이 부흥하였다.

1953년 8월 15일 해병 제2연대의 전방 진출로 김포부대는 제2연대 제5대대로 개칭되었고, 1954년 8월 1일 7대대와 6대대의 임무 교대도 있었으나 반병섭 군목은 전방부대인 6대대에 계속 잔류하여 군목업무를 수행하였다. 1953년 9월 28일 양곡 해병묘지에서 김포지구 전몰장병 추도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동년 12월 26일 세례식을 집행하여 106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는 매주 40여명의 결신자를 얻었는데 이는 부대장 심포학 소령과 부부대장 김한수 대위의 협조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반병섭 군목은 1953년 12월 1일부터 천막교실 2개를 마련하고 지역 내에 거주하는 아동들에게 중학교 과정을 교육하였다. 미 해병대의 도움으로 11개 교실을 신축했고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서 교육하는 학교로 이끌어 갔다. 이러한 일이 알려지자 해병여단장 신현준 소장과 김두찬 대령, 오명복 대령, 그리고 여단 장병들이 학교 건축기금을 마련해 주었다. 그후 이 학교가 발전해서 양곡중고등학교가 되었다.

1954년 10월 24일 신양섭 군목이 부임하였다. 반병섭 군목은 그의 취임 수 개월 전 이미 전속된 관계로 수 개월간 군목이 공석이었다. 그는 곧 천막교회를 수리하여 다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교인들은 30여 명씩 모였다. 그러나 7대대와 5대대가 교대한 후 5대대에는 80여 명의 교인이 집회하여 교회는 날로 발전하였다. 한편 그는 강화도에도 출장하여 대민사업을 성공리에 진행시키고 민간교회와 연합하여 전선을 방문하고 예배와 전도와 위문에 힘썼다.

- 김포전투단교회
1955년 4월 1일 보병 3개 대대, 해안대대 수용중대가 기간이 되어 해병 전투단이 발족하였다. 신양섭 군목은 전투단교회 군목이 되었다. 그는 김포 마송리에 주둔하다가 철수하는 미 해병 연대로부터 교회시설 일체를 인수 받아 전투단교회를 세웠다. 4월 14일 해군본부 군목실장 정달빈 군목을 비롯하여 내외 귀빈을 모시고 성대한 창설예배를 드렸다. 창설예배 순서는 경동교회 성가대의 협조로 더욱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그의 일과는 매우 바빴다. 주일에는 단 본부 예배를 인도한 후 제2대대, 제5대대, “따크”대대 순으로 예배가 계속되었고, 강화도에도 격주 1회씩 방문과 예배가 실시되었다. 성가대는 매주일 서울 교회의 도움을 받아 운영되어 나갔다. 이 성가대 운송을 위해 매주 차량이 차출되었다. 그 외에도 전선 위문, 성경연구회, 세례식, 각종 기념예배가 실시되었다. 그는 마송교회에 나가 매주 2회 씩 설교함으로 그 교회를 도왔다.

1955년 9월 15일 김포전투단의 해체와 병행하여 해병 제3연대가 발족하였다. 따라서 차현회 군목이 3연대 초대 군목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1955년 5월 12일부터 1957년 4월 20일까지 이 부대를 위해 일했다. 3연대의 초대실장으로서 그는 분주한 일정을 보냈다. 주일에는 5회의 예배가 진행되었다. 연대본부에서 예배를 인도한 후 계속해서 4개 대대를 순회하며 예배를 드려야 했다. 매 수요일에는 장병을 위한 종교강연을 하였고 120여 명의 장교가 모이게 된 것은 군종업무의 큰 성과였다. 도의교육은 중대 단위로 계획되었으므로 평균 주 3회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상담업무도 광범위하게 실시되었다. 그는 면회실과 상담실을 설치하고 모든 장병의 사정을 일일이 파악하여 그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그가 장교를 대상으로 한 상담에서 많은 효과를 거둔 것은 이색적인 일이다. 각종 위안과 구제사업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가 주 2회씩 전선 고지를 위문하여 해병들을 위로하고 연대 내의 무의탁 사병을 파악하여 그들의 외로움을 위로하여 준 것은 군종업무에서 새로운 시도였다. 또한 김포지구와 강화지구의 난민들을 위한 구제사업이 실시되었다.

1957년 4월 20일 차현회 군목 후임으로 오석태 군목이 부임하였다. 그는 연대본부교회에서 주일예배와 주간예배를 실시했다. 마송교회의 남녀 학생들로 조직된 성가대가 예배를 도왔다. 특히 수요일 예배에는 김포 미 공군 기지 Conrad Baldwin 군목의 협조로 종교 영화를 상영하며 색다른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리고 전후방에 산재한 각 중대를 위해 수시로 순회예배를 실시했다. 그는 주일 오후에 인접 미군부대의 미군을 위한 예배를 인도했고 주일 밤에는 민간교회의 예배를 인도함으로써 그들과의 유대를 강화하였다. 전후방 각 중대의 중대, 소대, 분초까지 방문하였고, 개인의 신앙지도, 신상상담, 도의교육 등이 동시에 행해졌다.

- 상륙훈련과 교회의 발전
그 해 가을 제3연대는 처음으로 상륙훈련을 위해 포항 해병기지로 이동하였다. 상륙훈련 중에도 군목업무는 활발히 진행되었다. 훈련을 위해 병력이 증가되었지만 한 곳에 밀집해 있었으므로 군목 활동은 더 편리했다. 오석태 군목은 이 무렵 포항지구 사령부의 군종실장 직을 겸하고 있었다.

1958년 2월, 미국인 선교사 R. E. Christopulos와 노르웨이 선교사 Ivar Olsen을 초빙하여 5일간 특별 부흥회를 하였다. 이 부흥회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돌아오게 만든 성대한 집회가 되었다. 이러한 계기를 통해 3연대에 기독장교회와  신우회가 조직된 것은 교회 활동의 한 획기적 사실이었다. 독실한 신앙의 소유자 이봉출 대령이 기독장교회 회장이 되었다. 그는 최초의 전방 교회가 세워진 독립 제5대대에서 신앙의 부대장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또한 신우회는 해병의 신앙을 지도함에 있어서 매우 조직적이고 활동적이었다. 이와 같은 교회의 활동으로 3연대는 또다시 신앙의 부대로 등장하게 되었다. 민간교회와의 유대도 맺어서 여러 차례의 연합예배가 거행되었다. 특히 3연대교회가 주최하여 포항지구 각 교파 연합으로 드린 부활절 촛불예배는 교회일치운동(에큐메니칼리즘) 측면에서 의미있고 성대한 모임이었다.

제1차 상륙훈련이 끝나자 3연대는 금촌 지구 휴전선 방어를 위해 다시 전방으로 복귀했다. 1연대와 진지를 교대했다. 우선 전방 지구의 군종업무를 강화하기 위해 각 대대에 군종반이 편성되었다. 이를 위해 신학교 출신인 부사관이 배치되어 대대의 종교활동 일부를 분담하였다. 주일 낮에는 각 대대 교인이 연대본부에 모여 합동예배를 드렸다. 전도, 교육, 상담을 위해 오석태 군목은 최전선 초소를 수시로 방문했다.

1959년 2월 5일 오석태 군목의 후임으로 주계명 군목이 부임했다. 주일 낮 연합예배가 예전처럼 연대본부교회에서 감동적으로 드려졌다. 이외에도 각 대대는 수요일과 주일밤예배를 개별적으로 드렸다. 군목은 예배를 위해 각 대대를 순회했다. 기독장교회는 매주 수요일 연대본부와 각 대대에 순번제로 모여서 성경연구 모임을 가졌다. 군목은 이 모임에서 성경연구를 지도했다.

1959년 3월 24일, 제3연대는 해병 제1상륙사단과 함께 제2차 상륙훈련을 위해 포항으로 이동하였다. 여기서 3연대 교회는 상륙 훈련 중인 제2연대 교회와 합동으로 포항기지의 연대교회에서 함께 군종업무를 실시하였다. 당시 이 교회를 ‘해병포항제2교회’라고 명명하였다. 예배는 주 3회 2연대와 연합으로 실시했다. 부대가 집결되어 있어서 군종업무를 수행하기에 더욱 편리하고 효과적이었다.

기독장교회 모임은 시내의 ‘포항제1교회’에서 매주 수요일 저녁에 계속되었다. 그러나 1959년 7월 5일 한국기독장교회의 포항지회가 발족되자 3연대 기독장교회도 이에 포함되었다. 주계명 군목이 다시 이 지회의 성경연구 지도자로 선출되어 이 모임을 계속 인도하였다.

1959년 9월 26일 주계명 군목의 전출로 인해 보좌관으로 있던 이석종 군목이 실장이 되었다. 그는 1959년 2월 15일 3연대에 보좌관으로 부임한 이후 주계명 군목을 보좌해 왔다. 3연대교회는 그에게 처음 맡겨진 부서였으므로 모든 업무를 성의껏 수행하였다. 예배는 여전히 주 3회 실시하였다. 도의교육은 월 1~2회씩 대대와 중대별로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고 발생 미연방지 또는 사기앙양 등을 위해 주로 과업 외 시간을 이용하여 수시로 교육해야만 했다. 그의 성의있는 활동으로 개인상담의 양이 상당히 많아졌다. 상담의 양이 증가할수록 그 내용도 복잡했다. 그러나 그는 내담자를 위해 성의껏 봉사했다.

영창 방문도 주기적으로 계속되었다. 기지 영창이 3연대 지역 내에 있어서 그는 주로 오후예배를 인도하고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교육과 선도를 위해 영창을 방문했다. 그의 노력의 결과로 영창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많은 해병들이 퇴창 후에 교회로 찾아 오게 되었다. 이는 이석종 군목에게 참으로 보람있는 일이었다.

1960년 7월 5일 이석종 군목의 후임으로 서도섭 군목이 부임했다. 그는 예배드리는 방법을 개선했다. 너무 체계적인 부대 환경으로 인하여 교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교인들을 위해 차출제도를 만들어서 교회로 모이게 하였다. 얼마 후 이 제도에 출석카드제를 겸하여 면밀한 교회 운영을 실시했다. 그는 무언(無言) 사회로 예배를 인도하여 예배 분위기를 엄숙하게 조성했으며, 1961년 부활주일에는 학습과 세례식을 겸하여 집행하였다.

3연대가 제주도 상륙훈련 기간 중 그는 1개 대대에 파견되어 개인 상담, 참호 방문 등 여러 가지 군목사업을 수행했다. 1960년 4/4분기에는 사단 계획에 의해 무연고사병 위안회를 개최했다. 또한 포항시내 민간교회의 협조로 성가대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1961년 제주도 상륙훈련 기간 중에는 함정에 승조하여 해군 해병 합동예배를 인도했다.


ㅇ진해해병기지교회

- 해병학교교회
이원동 군목에 의해 발족한 해병학교교회와 훈련소교회는 반병섭 군목에 의해 군종활동이 이어졌다. 1951년 11월 8일 제2대 해병학교 군목으로 반병섭 군목이 부임했다. 그는 주일에 해병학교 사관후보생과 가족을 위한 예배를 인도하고 이어서 훈련소의 예배를 인도했다. 주간예배도 모두 실시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1952년 2월 4일 이 교회에서 첫번째 세례식이 거행되었다. 당시 예배 인원이 92명 참석한 가운데 3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는 가정통신을 계획하여 이를 전반적으로 실시함으로써 민간인의 군에 대한 신뢰감을 증진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선데이 뉴스를 매주 프린트해서 장병들에게 배부하였고, 정신교육도 주 2회씩 계속 실시하였다.

- 해병교육단교회
1952년 8월 18일 해병학교와 훈련소가 병합되어 해병교육단으로 개편되었다. 이와 같은 행정조치가 번복돼서 동년 9월 11일 다시 교육단이 해체되고 해병학교와 훈련소로 분리되었다가 다음 해인 1953년 2월 1일 해병편명 제2호에 의거 해병교육단으로 다시 편성되었다. 이로 인해서 해병학교 군목실과 훈련소 군목실이 통합되었고 해병교육단 군목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군목업무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훈련소는 다른 어느 곳보다 군목업무가 절실하게 요청되는 곳이었으므로 1953년 3월 말까지 군목 파견실이 설치되었고, 훈련소와 교육단에서 각각 군종업무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교육단 발족에 의해 군목의 사무실이 해병학교(당시 진해여고)에서 원일봉 교육단 본부로 옮겨졌다. 1952년 9월 1일 이정근 군목이 반병섭 군목의 후임으로 부임했다. 1953년 4월 교육단 본부가 원일봉에서 경화동으로 이동함에 따라서 이정근 군목은 교육단 본관 하층에 사무실을 마련하였다. 그후 해병교육단의 강당이 대형 퀀셋으로 신축되자 강당 뒤의 사무실로 옮겼다. 5~6백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강당은 그 이후부터 예배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는 강당에 야전 풍금 1대, 찬송가 200여 권을 비치해서 해병대 사관후보생, 훈련병, 기간장병들이 불편함 없이 예배드릴 수 있도록 했다. 주일예배, 주간예배, 특별예배가 실시되었다. 주일예배는 사관후보생과 훈련병들을 위해 두 번씩 실시하였으며 평균 130명이 모였다. 수요일의 주간예배는 사관후보생을 위한 것으로서 평균 280명이 모였다.

성례전을 비롯한 각종 예식도 집행되었다. 1953년 2월 4일 3명에게 세례가 베풀어졌고, 같은 해 1월 11일 2명에게 학습이 베풀어졌다. 인천상륙기념일인 1952년 9월 16일에는 장춘단 묘역에서 인천상륙작전 중 전몰한 장병을 위한 추도식이 있었다.

그의 손길은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입원환자와 영창의 죄수들을 방문해서 위로하고 격려했다. 상담도 계속하였다. 그는 군법회의에 참석하여 피고인들의 억울한 사정을 변호하기도 했다. 해병학교 도서실을 운영하는 일도 그에게 부과되어 있었다.

1953년 9월 10일 김덕순 군목이 이정근 군목의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도 성의껏 교회를 위해 봉사했다. 주일 아침예배와 밤예배가 단본부교회에서 실시되고,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저녁에는 해병학교와 의무중대에서 주간예배가 실시되었다. 주일예배에는 평균 4~5백 명이 모였다. 성가대도 여자 문관(군무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고 각종 환송 및 환영예배가 행해졌다.

1953년 10월 1일 신양섭 군목이 보좌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1954년 10월까지 김덕순 군목을 도와 확대되는 군목업무를 감당했다.

1954년 10월 1일 김덕순 군목의 후임으로 한기원 군목이 부임했다. 그의 부임 이후 전반적인 군목업무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1955년 1월 15일 정인상 군목이 보좌관으로 부임하여 1956년 2월 4일까지 근무했다. 이후 신현균 군목이 1956년 2월 19일 다시 부임하여 동년 10월까지 보급정비단에서 근무하였다.

한기원 군목은 예배장소로 사용하던 강당을 보수하고, 해병보급정비단교회를 병합하여 ‘해병교회’라는 공식적인 명칭을 부여했다. 이는 해병교육단 발 1257호에 의거 하달되었다. 이 교회 정면에 십자가를 붙인 백색 종탑이 높이 세워졌다. 이와 같은 교회의 외형적 발전은 내적인 면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어서 1955년 11월 30일 작명에 의해 군종실이 군종참모실로 승격했고, 장교 2명과 병 4명으로 기구가 구성되었다.

한국 기독장교회(OCU: Officers’ Christian Union)가 이곳에서 발상되었다는 사실은 해군 군종사상 하나의 특기할 사실이다. 기독장교회는 세계 모든 국가의 군대 속에 널리 조직되어 있는 기구다. 이는 군목사업을 측면에서 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사도행전 1장 8절)”는 주님의 분부를 실행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 당시 해병학교에 근무하던 문희석 중령은 미 해병학교에서 선진국 기독장교 운동을 직접 확인하고 돌아 온 일본 동지사대학 신학부 출신의 신실한 교인이었다. 1956년 1월 9일 문희석 중령과 한기원 군목의 노력으로 최초의 한국 기독장교회가 조직되었다. 9명의 장교가 가족과 함께 이 모임을 가진 것이다. 매주 금요일 저녁 실시된 이 모임은 각자가 윤번제로 성경을 한 장씩 연구하여 발표하면 그 내용을 토론하고 공부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신우회도 조직되었다.

서울시 용산구 소월로 20길 82
전화번호 : 02-777-6613
다음카페 : https://cafe.daum.net/godkmc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