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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중 해병대 예하부대 교회의 설립과 부흥2

Kenny 2024-03-12 6개월전
ㅇ도서부대 교회

6.25 전쟁 중 해병대의 북진(北進)으로 38도선 이북 여러 도서에 교회가 세워졌다. 해병대는 1952년 1월 해병 도서부대를 편성해서 동해와 서해의 여러 도서에서 상륙 출발대와 합세해서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했다. 해병들이 상륙하는 섬마다 군목들이 따랐고 군목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졌다. 서해에서는 제일 먼저 백령도, 이어서 석도, 초도, 연평도에 교회가 세워졌고, 동해에는 여도와 여도를 둘러싼 6개 도서에 교회가 세워졌다. 하지만 휴전으로 인해 석도교회, 초도교회, 그리고 동해부대의 교회들은 모두 철수하게 된다. 해병제2연대교회가 철수한 부대를 기간으로 창설되었다. 이어서 보급정비단과 상남훈련소에도 교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당시 해병대의 유일한 사단인 제1상륙사단에 복음이 전해지고 김포 제1여단에 교회가 창설되었다.

- 백령도교회
1952년 7월 7일 전덕성 군목이 최초의 복음전사로 이 섬에 발을 디뎠다. 이때는 해병대가 이 섬에 주둔한 지 반년이 되었을 시점이었다. 그는 민간교회에서 15년의 경력과 약간의 육군군목 경력이 있었는데, 백령도는 그의 군목 여정의 출발지가 되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10여 일에 걸쳐 토굴(土窟) 군목실을 완성했다. 그러나 부대 내에서 예배장소를 마련하기 어려워서 초등학교 교실을 임시로 빌려서 7월 13일 창설예배를 드렸다. 부대장을 비롯한 74명의 장병이 이 예배에 참석하였다. 이후 매주일 10시 평균 1백여 명의 장병이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군목실 구성원도 문관(군무원) 2명, 사병 5명으로 증가되었고, 9월에는 성가대가 조직되어 예배순서를 다채롭게 장식하였다.

예하의 여러 단위부대에서도 예배가 실시되었다. 9월 28일 최초의 성례전이 거행되어서 학습 36명, 세례 3명이 신앙의 서약을 했다. 세례자는 본부중대장 김세권 중위, 의무중대장 송 대위, 교육대장  김 중위 등이었다. 그는 연평도 부대를 방문하여 매주일예배를 드리도록 주선했다. 이후 그곳의 민간교회 김제석 목사가 매주일예배를 위해 수고해 주었다. 또한 전초부대 석도에도 교회를 세우도록 해서 유영근 군목을 배속시키도록 사령부에 건의하였다.

그의 일정은 매우 바빴다. 환자 방문, 영창방문 등을 비롯하여 정신훈화를 위해 단위부대 방문을 정기적으로 실시했다. 전투가 있는 곳이므로 의례히 장례식도 있었다. 9월 26일부터는 참모회의가 군목의 기도로 시작된 것은 군목업무의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특히 도내 민간교회와의 유대도 긴밀했다. 당시 도내에 6개의 민간교회가 있었으나 목사는 2명이었다. 더욱이 목사들이 육지로 자추 출타해서 교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워했다. 따라서 전덕성 군목은 민간교회 방문계획을 세우고 예배와 특별집회 등을 인도하여 목자없는 양을 지도했다. 특히 김두찬 부대장의 의도에 따라 도내 고아들을 위해 고아원을 설치하고 28명의 고아들을 수용했다. 이로 인해 이 고아원은 그 이후 해병대와 끊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1953년 2월 3일 김경수 군목이 제2대 실장으로 부임했다. 그의 노력으로 군목업무는 더욱 발전했다. 유급 전도사 1명과 유급 성가대원 4명이 채용되었다. 이 일을 위해서 당시 부부대장 이봉출 소령의 협조가 컸었다. 그는 매일 아침 7시 종교시간을 할당받아 부대 방송망을 통해 전도방송을 계속했다.

대민사업도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2월 28일 고아원이 정식으로 개원하였고, 교육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군민 연합예배도 수시로 진행하였고, 화동교회, 연지동교회 신축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특히 계몽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책을 구할 수 없는 교인들을 위해 도서구입, 종교신문 구독을 지속적으로 알선해 주었다.

1953년 8월 16일 유영근 군목이 3대 실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석도와 초도에서 활발한 군목업무를 전개하다가 휴전으로 인한 부대 철수로 이곳에 부임하게 되었다. 유영근 군목은 진촌 군민 연합교회 건축을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마침내 이 교회는 그가 후송한 석도교회의 건축자재와 진촌 민간인이 헌금한 건축자금으로 건립되었다. 부대의 협조로 종각도 세워졌다.

그는 일상적인 예배 외에도 부대 방송망을 통해 다락방을 낭독하는 간단한 아침예배를 지도했고 성경통신공부를 실시해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생일잔치, 웅변대회 지도, 개인상담, 초소방문 등의 군종업무를 병행했다. 그는 백령도민의 생활지도를 위해 협동조합 창설의 기반작업을 진행하던 중 전속명령을 받았다.

1954년 2월 8일 차현회 군목이 제4대 실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감리교 신학교를 졸업한 유능한 군목이었다. 이 교회는 그에게 초임지였다. 그는 진촌교회에서 군민 연합예배를 드렸고 주일 낮 예배를 2부로 진행하였다. 1부 예배는 민간교인과 중대본부 교인, 2부 예배는 각 중대 교인을 대상으로 하였다. 주일 밤예배와 새벽기도회도 계속되었다.

매주 3회 중대 단위로 실시되는 도의교육은 그의 일과를 더욱 분주하게 했지만 그 외의 업무가 소홀하게 다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병원방문, 초소방문도 그의 주요 일과였으며, 그는 개인상담소를 설치하여 외로운 섬 근무로 인한 고민과 어려움에 처한 대원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었다. 웅변지도, 토론회 지도도 그가 수행한 업무 중 하나였다. 대민사업도 활발하게 전개했다. 그는 백령도민의  생활고를 CWS(세계기독교봉사회)에 호소하여 2차에 걸쳐 구제사업을 실시했다. 의류와 식량을 가득 싣고 배가 섬에 들어올 때마다 도민들의 기쁨은 대단했다. 그 이후 십여 년이 지났음에도 그들이 차현회 군목을 두둔하였음을 볼 때, 그가 도민을 위해 얼마나 봉사했는지를 알 수 있다.

1955년 4월 19일 송창설 군목이 제5대 군목으로 부임했다. 이곳은 그에게 초임지였다. 차현회 군목 시절처럼 군민 합동으로 모든 예배와 종교행사가 진행되었다. 그는 연 1회씩 성례전을 베풀었다. 장병과 민간인 32명이 세례를 받은 것은 그의 노력의 결실이다. 미 공군부대와도 연락을 긴밀히 해서 종종 합동예배를 드렸다. 도의교육, 병원방문, 초소방문 등이 정기적으로 행하여졌다. 도의교육은 예하 각 중대 단위로 월 평균 4시간, 병원방문은 거의 매일 실시했다.

1956년 2월 10일 오석태 군목이 제6대 군목으로 부임했다. 그는 진촌교회에서 드리는 군민 합동예배를 중지하고 부대 안에 퀀셋 교회를 새로 마련해서 군 단독으로 예배를 드리도록 하였다. 주일  낮과 밤예배, 수요예배까지 이 교회에서 진행되었다. 그의 노력으로 민간인 성가대가 조직되어 군인교회의 예배를 은혜스럽게 장식했다. 한편 미 공군부대 교회 및 도내 민간교회와의 유대도 긴밀하게 계속되었다. 민간인 성가대가 미 공군부대 교회의 예배를 정기적으로 도왔고, 오석태 군목은 미 군목이 자리를 비울 때 그 교회의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 말씀의 봉사자로서 설교자없는 도내의 여러 교회는 항상 그가 배려했던 대상이었다. 미 공군군목 파크스 소령도 피난민 구제 사업에 진력했다. 1956년 여름에는 기독학생 하기(夏期) 전도대가 섬에 들어와서 군민전도에 크게 기여했다.

오석태 군목은 전덕성 군목이 세운 고아원을 적극 지원하였다. 고아들을 위한 부식, 연료, 기타 필수품을 지원하였고 일부 중학생의 학비까지 부담했다. 이 사업은 미 공군군목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가능했다. 진촌교회 유치원은 해병대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해병대는 유치원 건물을 보수하여 주었으며 동절기에는 난방용 연료를 공급해 주었다. 또한 미 군목을 통해 미군교회에서 사용하던 피아노 1대를 기증받도록 주선하였다.

1957년 4월 20일 신종선 군목이 부임했다. 부대사정에 의해 그가 부임한 이후 다시 군민 합동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주일예배와 수요예배가 실시되었으며 주일예배는 시간을 구분하여 드려졌다. 1957년 여름 연세대학교 신학과 대학생 중심이 된 하기 전도대가 해군 함정 편으로 섬에 들어왔다. 그들은 숙식제공의 불안정으로 많은 고생을 하였으나 군민전도에는 큰 성과를 남기고 돌아갔다.

1958년 12월 16일 주계명 군목이 발령은 받았으나 교통편 문제로 인해 다음 해 1월에 부임했다. 그의 부임 후에도 예배는 군민 합동으로 실시했다. 1957년 2월 9일부터 6일간 진촌 군민연합교회에서 개최된 손치호 목사의 부흥회는 군민 교우들에게 많은 은혜와 각성을 주었다.

1958년 10월 25일 부대 본부가 진촌에서 사곶으로 이동함으로써 부대 내에 군인교회를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주계명 군목에 의해 교회 신축사업이 시작되었다. 교회신축을 완성할 때까지 주일 낮 예배는 진촌교회에서 주일밤예배와 수요예배는 인근 사곶교회에서 군민 합동으로 드려야 했다. 당시 서해부대에는 문맹자 156명이 있었다. 이들을 위해 1개월간 교육기간을 정해서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했다. 민간교회와의 접촉도 빈번했다. 주계명 군목은 도내 여러 곳의 민간교회 부흥회를 인도했다. 이는 군민 간 유대를 더욱 강화하였고 목자없는 교인들에게 올바른 신앙과 생활태도를 가르쳐 주는 성과를 거두었다.

1958년 11월 20일 서도섭 군목이 부임했다. 이곳이 그의 군목 생활의 출발지였다. 그는 부임해서 큰 교회건축을 계획했다. 건축 공사는 추운 겨울에 진행되었고 그해 12월 25일에는 유리창 없는 교회 마루 위에서 감동적인 성탄예배를 드렸다. 각종 난관을 극복하고 1959년 5월 건평 30평 흙벽돌 반 목조(反 木造) 건물의 교회가 준공되었다. 도내의 많은 귀빈과 교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헌당예배를 드렸다. 이로써 이 교회는 해병대와 온 섬의 신앙을 상징하듯이 부대 본부의 명당 자리에 높이 서게 되었다.

교회건축을 끝낸 그는 교회의 내적인 면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진촌교회 성가대로 하여금 부대 본부교회의 예배를 돕도록 요청했다. 이 성가대는 매주일 군인교회의 예배순서를 더욱 은혜롭게 장식해 주었다. 교인들의 신앙의 자질을 높이기 위해 부대 교인들로 하여금 성경통신 공부를 하도록 했고, 중화동교회에서 열린 동기 성경학교 1개월 코스에 교인 9명을 파송하여 공부하게 했다. 성경구절 암송대회도 개최하였다. 1959년 3/4분기에는 공군 군종감 임동선 군목을 초빙하여 부흥회를 개최함으로써 교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특히 같은 해 성탄절에는 상징적인 대북방송을 실시하였다. 1개 중대 병력이 월계동 전방 OP(Observation Post, 관측소)에서 북쪽을 향해 성탄의 노래를 불렀다. 이어서 군목은 북한동포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다. 그는 정기적으로 OP와 초소 방문을 실시했다. 전방초소 특별방문 시에는 한 초소에서 하루씩 그들과 숙식을 함께 하기도 했다. 인근 도서인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에 주둔하는 해병들을 위해 신앙상담, 도의교육, 위로와 격려업무도 병행했다. 물론 이러한 업무를 통해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였다.

대민사업으로 백령고아원을 위해 아동문고 수집에 협조하였고, 고등학교 진학이 어려운 2명의 고아에게 부대 장병들의 도움을 받아 장학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또한 약간의 부식과 연료도 지원하도록 조치했다. 민간교회와의 연락도 자주했다. 그는 백령도 내의 민간교회를 수시로 방문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친교를 두텁게 하는 것을 계속했다.

- 석도교회와 초도교회
백령도에 이어서 교회가 세워진 곳은 석도와 초도였다. 진남포를 턱 앞에 바라보는 이 석도교회는 앞의 “해병대사령부 예하부대에 교회가 세워지다”에서 기술하였듯이 예하부대 교회 중에서 독립 5대대교회에 이어 두 번째로 창설된 교회다. 하지만 그 사실과 거의 관련이 없이 석도에 다시 교회가 세워졌으므로 다시 기술하고자 한다. 석도에 교회가 세워지고 곧이어 초도에도 교회가 세워졌다. 면적이 백령도와 비슷한 초도는 석도에 인접한 섬으로 해병 제7대대의 방어지역에 속해 있었다.

- 석도교회 재창설
1952년 8월 28일 유영근 군목이 석도에 부임하였다. 유영근 군목은 숭실전문학교를 거쳐 부산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유능하고 건실한 군목이었다. 그는 이 섬에서 군목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6.25전쟁 중이었고, 그는 이 섬에 두 번째로 상륙한 복음의 전사였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그가 처음 상륙한 해군군목이었다. 그 이전에 들어왔던 신성국 군목이 이 섬을 떠난지 1년이 지난 후였으므로 그는 개척자로서의 역할을 해야만 했다. 실제로 그는 전임자와는 다른 기반에서 목회를 창설해 나갔다.

유영근 군목이 부임하고 3일째 되는 8월 31일이 이 섬에서 처음 맞는 주일이었다. 이날 오전 10시 야외에서 539명의 한미 양국 해병대가 모인 가운데 창설예배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유영근 군목의 설교에 이어 민용식 부대장(소령)의 격려사와 미 고문관의 축사가 이 예배를 한층 더 엄숙하게 만들었다. 그 후 매주일 평균 4백 명의 대원이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성가대도 조직되어 예배시간을 더욱 다채롭게 했다. 곧이어 신약성경 통신과가 시작되어 75명이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교안을 작성하여 프린트로 교재를 만들었다. 매일 오후에는 참호를 일일이 방문해서 개인전도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로 인해 1953년 5월까지 그는 391명의 결신자를 얻어 66명에게 학습을 베풀었다.

- 초도군인교회
1952년 9월 10일 유영근 군목은 초도까지 겸무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는 즉시 초도에 부임하여 초도군인교회를 창설하였다. 1952년 9월 10일 초도 소사초등학교 강당에서 창설예배가 성황리에 거행되었다. 장병 316명과 민간인 159명이 운집한 가운데 이 창설예배는 유영근 군목의 설교, 이동호 전도사와 민사관 조만식의 축사, 초도교회 성가대의 다채로운 음악 프로그램의 지원으로 성대하고 은혜스럽게 마무리되었다. 성령의 역사가 이 서해 고도에서 기운차게 나타난 것이다. 예배는 이 군인교회에서만 드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곧 각 중대 방문예배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성가대도 조직하였다. 민사처에서는 성가대원에서 특배(特配)까지 주었으므로 이 성가대는 나날이 발전하였다. 유영근 군목이 가는 곳마다 성경 읽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성경읽기 운동을 장려해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유영근 군목은 부대와 섬 교인들의 사정을 고려하여 군민연합교회 창설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1953년 10월 16일 이동성 부대장을 위원장으로 군민연합교회 신축위원회를 조직하고 자신은 부위원장이 되었다. 이 위원회의 활발한 활동으로 140만 환의 성금과 외국 쌀 65포대가 건축기금으로 확보되었다. 당시 초도 주재 미 공군 윌리암 카큰 소위가 120만 환을 헌금하기로 했던 것은 기록할만한 일이었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1952년 12월 5일 군민 60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성대한 상량예배가 거행되었다.

그의 지도력의 영향은 대내외적으로 부대 군인들과 민간인들의 일상생활 속 깊이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 섬은 작전상 중요한 전초지였으므로 해병대와 미 공군과 타군의 유격대와 정보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따라서 매일 각 부대간의 알력과 충돌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민간인과의 충돌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는 이와 같은 상호 갈등에서 오는 문제를 상호 이해하고 협조함으로써 해결하고자 초도 군민 합동 신생회(新生會)를 조직했다. 그는 기관을 통해 군민 간의 충돌을 완화하는 동시에 도내 민간인 생활을 계몽 선도하였다. 이와 같은 계획은 나날이 성공적으로 진보하였다. 그가 초도를 하나의 모범적인 이상촌(理想村)으로 만들어 보고자 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1953년 성립된 휴전은 하나의 불행한 사실을 초래했다. 휴전선 이북에 위치한 부대들의 철수로 인하여 이곳의 교회들이 문을 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6월 13일 철수의 명을 받은 유영근 군목은 완공 중에 있는 초도군민연합교회를 헐어서 백령도로 이송했다. 이것이 백령도군민연합교회 건축 자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백령도로 철수하여 그곳에 머물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유영근 군목에게 뿐만 아니라 초도 내 교회에도 분명히 애석한 일이었다. 이로 인해 초도와 석도의 군목 업무는 단지 해군 군종업무에 있어서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데 불과하게 되었던 것이다.

-동해부대교회
1951년 초부터 동해부대는 영흥만에 위치하고 있는 여도를 중심으로 주위의 8~9개 도서에 분산하여 주둔하고 있었다. 이 도서에는 해병 약 1개 대대와 다수의 미 고문 병력, 각군의 정보대원이 약간명 함께 주둔해 있었다. 이 해병 도서부대의 임무는 해안선과 도서방어 및 정보수집 활동이었다.

1952년 8월 20일 한기원 군목이 이곳에 부임하였을 때는 피아간 공방전이 한창일 때였다. 장병들은 적의 해안포가 빗발처럼 퍼부을 때마다 화약의 악취 속에 묻혀 황토 참호 속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 살벌한 전쟁터가 그의 초임지였다. 그는 해병 특과 장교 제7차로서 모진 훈련을 끝마치고 이곳에 부임하였다.

한기원 군목은 부임 후 곧바로 지휘본부가 주둔하고 있는 여도에 벙커를 구축하고 교회설립의 기초 작업을 해나갔다. 1952년 10월 첫째 주일아침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야전천막 속에서 4명의 교인과 함께 첫 예배를 드렸다. 이와 같은 전방지역에서 대원들이 한 곳으로 집결하는 것은 적의 해안포 목표물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그는 이 가설 임시 천막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각 벙커를 일일이 순회하면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회의 정착은 필요불가결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그는 부대본부에서 조금 떨어진 학교건물을 보수하여 여도군인교회를 만들었다. 교인이 매주일 50여 명씩 모이곤 하였다. 뒤이어 양도에도 교회가 설립되었다. 1952년 11월 부대장 최적 대위와 군속(군무원) 김영활 장로의 협조로 부대 내의 한 건물이 교회당으로 헌당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동해부대에는 여도군인교회와 양도군인교회가 설립되고 정착하게 되었다.

한기원 군목은 정기적으로 주위 6개 도서를 순회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동시에 전쟁으로 인해 삶의 극한 상황 속에 있는 그들을 진심으로 위로해 주었다. 그가 순방한 도서는 대도, 사도, 웅도, 신도, 모도, 황토도 등이었다. 장례식도 빈번하게 행해졌다. 그는 ‘평화를 위한 젊은 공헌자들’이란 십자가 묘비를 세워 그들의 짧은 삶의 의미를 기억하게 해 주었다.

「고도(孤島)의 벗」이란 신앙지가 인쇄되어 나왔다. 그는 고도에서 외로이 분투하는 그들에게 참으로 친철하고 기쁜 벗이 되어 주었다. 통신 성경학교도 개설되어 성경을 기반으로 한 복음의 씨가 여러 섬에 심겨져 나갔다. 대민 구호사업도 실시하였다. 그는 기독교 봉사회의 후원을 받아 수많은 피난민을 구호해 주었다.

1953년 6월 2일 아침 신호섭 군목이 한기원 군목의 후임으로 이 섬에 부임하였다. 신호섭 군목은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민간인 목사로서 이곳에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군목의 인원 부족으로 인해 자신이 군목으로 임관하기 전에 최전방에 배치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재임기간은 불과 1개월 정도였다. 이때는 휴전협정 조인을 앞둔 찰라였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군목업무는 여전히 지속되었다. 여도군인교회에서는 매주일 50여 명의 교인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양도에는 2주에 1회씩 순회예배가 실시되었으며 「고도(孤島)의 벗」이 계속 발간되었고 성경통신과가 운영되어 나갔다. 휴전조약 조인을 전후해서 휴전선 이북에 위치한 여도의 철수작전 명령이 떨어지자 군은 도서 내의 피난민 철수작전을 함께 수행해야 했다. F-S 1척이 민간인 후송단으로 배당되었다. 하지만 이 배 1척만으로는 일상생활을 위한 필수품만을 골라서 싼 그들의 봇짐 하나까지 제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너무나 눈물겨운 사실이었으므로 그는 부대장 이영우 중령과 미 고문관의 협의를 얻어서 F-S 1척을 더 지원받도록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피난민들은 가능한 자기 소유물을 모두 가지고 속초와 주문진에 피난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1953년 7월 12일 손홍수 군목이 신호섭 군목과 교대했다. 당시는 부대가 철수작전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7월 말일 경 전사한 전우들의 넋을 후방에 안치하기 위해 묘를 다시 정리하여 전부 화장하였다. 조국의 평화를 위해 꽃다운 젊은 생명을 바친 많은 넋을 위해 철수 이전 모든 장병과 함께 애절한 단장의 기도를 올렸다. 아직도 그 기도의 메아리는 북녘 하늘 아래서 맴돌고 있을 것이다.

동해부대는 7월 30일 경남 상남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리고 이 부대는 서해부대와 통합하여 해병 제2연대를 창설하게 되었고 복음의 기치가 새로운 바람결에 높이 나부끼기 시작했다.

- 강화부대교회
해병 강화부대는 하나의 독립된 부대는 아니다. 하지만 군목이 파견되어 독자적인 군종업무를 실시하였기에 별도의 항목으로 구분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이 지역에 군목이 처음으로 배치된 것은 1954년 3월 15일이며, 차몽구 군목이 부임하였다. 당시 이곳에 배치된 병력은 2개 중대 규모로써 13중대와 14중대였기에 군목이 배치될 만한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부대 장병의 정신무장과 대민 선무공작의 긴급성으로 인해서 특별하게 군목이 요청된 것이었다.

따라서 차몽구 군목은 대민 선무사업과 장병 정신교육, 주둔 중인 한미 여러 부대간의 융화를 도모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경주해야만 했다. 이 지역에 오랫동안 주둔했던 어느 첩보대의 민폐로 군과 민간의 사이는 크게 벌어져 있었다. 더욱이 이곳에 주둔한 한미 여러 부대들간의 불미스러운 알력은 군의 위신을 더욱 손상시켰다. 또한 군 내부에서도 마음이 해이해진 장병들은 나태하고 불미한 생활로 인해 취약한 상태였다. 우선적으로 그는 민사장교로서 도서 내의 여러 민간인들과 원활한 친교를 맺으면서 민폐 방지에 최선을 다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방 OP와 초소를 일일이 방문하면서 장병들에게 힘과 용기가 솟구치도록 교육하고 위로했다. 그는 전방의 장병들과 숙식을 함께 하면서 그들의 생활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 그에게 부과된 업무를 성의껏 진행시켜 나갔다. 이러한 과업이 아무리 특수하고 중요한 임무라 할지라도 그는 본질적이고 값진 말씀의 사역자로서의 임무를 게을리할 수 없었다. 주일에는 의례적으로 부대 본부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 예배는 명령 하에서 부대장 이하 전 장병이 모두 참석하는 예배였다. 하지만 이렇게 명령으로 진행되는 예배 속에서도 성령의 은혜는 변함없이 나타나고 했다. 민간교회와의 유대도 긴밀하게 강화되었다. 그는 도서 내에 산재한 40여 곳의 감리교회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그들과 그리스도를 통한 친교를 맺었다. 또한 그는 대문, 아점 등의 여러 교회가 신축 중일 때 미 해병대 트럭을 차출해서 건축자재를 운반하도록 그들을 지원했다.

1954년 6월 12일 정인상 군목이 차몽구 군목의 후임으로 부임했다. 그는 전임 군목이 닦아 놓은 기초 위에서 군목업무를 보다 용이하게 할 수 있었다. 이전처럼 예배가 정기적으로 계속되었다. 대민 선무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온 교회가 협조함으로써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그의 노력으로 한미 해병장병들은 강화유치원의 위문단으로부터 많은 위안을 받기도 하였다. 그도 OP와 초소 방문을 계속하였다. 당시 그는 제10고지에서 모든 대원의 총애를 받는 인기있는 노병(老兵)을 전도함으로써 그의 여러 동료들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었다.

그는 젊은 중대장들의 경박하고 나태한 생활을 선도하고자 그들을 충고하고 권면했다. 그러나 이들은 군목의 충고를 듣지 않고 그를 모함하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그는 부득이 그곳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오묘했다. 그 이후 정인상 군목은 자신을 오해했던 한 장교의 결혼식을 주례함으로써 그가 개과천선하게 만드는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해 12월 11일 정인상 군목은 강화부대를 떠났다. 그의 이임 이후에는 이곳에 군목이 배치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부대가 군목의 업무 영역에서 소외된 것은 아니었다. 연대본부 군목들이 정기적으로 이 도서를 방문해서 군목이 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이다.

1959년 3월 16일 강화부대에 다시 전속 군목이 배치되었다. 그는 한승혁 군목이었다. 그가 부임할 당시 이 부대는 1연대에 배속되었으나 그해 5월 새로 발족한 해병 제1여단으로 소속이 다시 바뀌었다. 부임 초기 한승혁 군목은 그 부대의 인사장교 역할을 한동안 겸무했다. 당시 그는 해병 행정병과 장교로서 군목업무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해 4월 둘째 주일에 인근 민간교회인 하점교회에서 군민합동예배를 드림으로써 강화부대 교회 재건을 시작했다. 6월에는 예배장소를 부대 내로 옮겼다. 하점교회는 거리 상 대원들이 출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다음해 1월에는 장교 숙소를 인수해서 교회로 사용함으로써 고정된 교회건물을 확보하였고, 강대상과 의자, 약간의 도서를 비치하였다.

그는 월 1회 도서 내 34개소의 OP, 초소, 검문소를 방문해서 예배와 상담과 교육업무를 실시했다. 이러한 순회업무는 기동력이 없는 그에게 매우 벅찬 일이었으나 사령부에서 지원해 준 군목용 자전거가 좋은 기동력을 제공해 주었다. 그는 각 초소, OP, 검문소 마다 1명의 교회 책임자를 두어 교세확장에 노력했다. 개인상담은 주로 전출입하는 장병을 대상으로 해서 중점적으로 실시했다. 도의교육은 각 막사의 중견간부인 부사관을 주기적으로 교훈함으로써 그 막사의 도의적 생활을 향상시켜 나갔다.

순회 도서문고도 마련하였다. 이 문고는 음주와 천박한 오락으로 여가를 즐길 수 밖에 없는 해병들의 생활을 건전하게 이끌어 가는 수단이 되었다.

대민관계의 중요 업무도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그는 도서 내의 기관장, 유지들과 긴밀하게 연락함으로써 민폐와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도록 노력했다. 도내 60여 개 민간교회와도 그리스도 안에서 친교가 맺어졌다. 이 교회들은 수시로 위문단을 구성해서 부대방문을 하였으며, 자신들의 교회에 출석하는 해병대 교인을 잘 지도해 주었다.

1961년 4월 김상모 군목이 조승혁 군목 후임으로 부임했다. 그는 같은 해 7월 13일까지 근무했다. 김상모 군목의 후임으로는 라길동 군목이 부임했다. 그도 몇 개월 후 군목 부족으로 여단본부로 철수하였다. 이로 인해서 이 부대에 다시는 전속군목이 부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의 군종업무는 지속되었다. 여단본부 계획에 의해서 정기적으로 군종장교가 이 부대를 방문하여 예배, 교육, 상담, 기타 군종 업무를 하였다.

- 해병제2연대교회
해병 제2연대는 휴전으로 철수한 동해부대와 서해부대의 일부가 통합해서 1953년 8월 15일 경남 창원군 상남에서 발족했다. 부대 발족과 동시에 김경수 군목이 초대실장으로 부임하였으며 동해부대에 파견되었단 손홍수 군목이 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군목업무는 부대편성의 분주한 와중에서도 정지할 수 없었다. 따라서 부대교회는 없었지만 상남장로교회에서 군민합동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매 예배 시 약 3백 명의 교인이 모였다. 말씀을 사모하는 여러 사람들이 교회의 벽을 뚫고 들어와 설교를 듣고자 하는 장관이 벌어지기도 했다. 1953년 9월 21일 황재열 군목이 제2대 실장으로 부임하였다. 연합예배는 그 다음해 2월 2연대의 전선 이동 시까지 계속되었다.

1954년 2월 2연대가 휴전선 방어를 위해 서부전선 금촌지구로 이동하였다. 황재열 군목은 곧 문산중학교에 예배장소를 마련하여 군민합동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는 연대본부에 천막교회를 세웠다. 그는 천막교회에서 예배를 드릴뿐만 아니라 중학교와 공민학교를 설립하여 전쟁으로 중단되었던 교육사업을 측면에서 지원했다. 아동면에 주둔하고 있는 교인들은 아동장로교회를 창설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보좌관 손홍수 군목의 노력도 그치지 않았다. 그는 주기적으로 각 대대를 방문하여 예배와 교육과 심방을 계속했다.

그해 성탄절에 고지에서 대북방송을 실시한 것은 기록할만한 일이다. 이것이 성탄절 대북방송의 첫 번째 사례가 되었다. 양정고등학교 밴드와 군민 합동 성가대원 1백여 명이 성탄절의 기쁜 노래를 강 건너 북한 땅으로 흘러 보냈다. 상탄의 기쁜 소식은 장막 속에서 허덕이는 그들에게는 꼭 전해야겠다는 심정을 막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1954년 11월 16일 김덕순 군목이 황재열 군목 후임으로 부임했다. 당시 그가 인수한 교회 현황은 다음과 같다. 대원은 선임하사관과 운전수를 합하여 모두 6명이었다. 교회는 천막 2개를 이어서 만든 반 목조 건물이었으며 장의자 38개, 강대상 1개, 야전 풍금 1대가 비치되어 있었다. 전방 연대교회로는 손색이 없는 장비와 병력이었다.

김덕순 군목은 부임 초부터 수개월간 새벽 제단을 쌓아 나갔다. 주일에는 연대본부교회에서 아침예배와 밤예배가 실시되었고 삼일기도회도 계속되었다. 성가대는 문산여자중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주일 예배를 도왔다. 정기적으로 대대와 중대를 위한 순회 예배가 실시되었고 금요일에는 수용(受容)중대에서 예배가 거행되었다.

마을 어린이를 위해 연대본부교회에 어린이 교회학교가 시작되었다. 이 학교는 날로 발전해서 7명의 교사가 62명의 학생을 지도하게 되었다. 양동리에도 어린이 교회학교가 세워져서 120명의 학생이 모였다.

1955년 7월 연대본부가 탄현면 덕수리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곧 교회가 연대본부에서 제일 높고 좋은 위치에 아담하게 새로 세워졌다. 이 교회에는 평균적으로 약 50명의 군인과 20명의 민간인이 모였다. 군목은 부대 인근 민간교회 건축을 위해 여러모로 협조하였다. 탄현면 대동리 교회와 금촌감리교회는 김덕순 군목의 도움으로 부대의 많은 지원을 받았다. 매일 20명의 병력이 65일간 112대(연 차출수)의 GMC 트럭으로 금촌감리교회를 위해 건축자재를 운반해 주었다.

그는 작명(作命)에 의해 도의교육을 본부와 각 대대별 실시하였고 개인상담은 전방 중소대 방문 시에 병행하였다. 전방 고지와 초소 방문 시 그는 전도지와 팜플렛을 배부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1956년 4월 18일 손홍수 군목이 김덕순 군목의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도 연대본부에서 예배를 드릴 뿐만 아니라 정기적으로 예하부대를 순방하여 중대단위로 예배를 실시하였다. 때로는 침구를 들고 고지에서 고지로 초소에서 초소로 전전하면서 상담과 교육과 권면을 하는데 힘썼다. 당시 연대장 강기천 대령이 사령부교회에서 세례를 받게 된 것도 그의 전도와 권면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군종장교의 부족으로 손홍수 군목의 이임 후 약 1년 반 동안 2연대에는 전담군목이 배치되지 않았다. 사단군목이 2연대를 겸무하였다. 전덕성 군목, 김덕순 군목 등이 주간예배와 주일예배를 인도하는 정도로 교회의 명맥을 겨우 유지하였다.

1958년 3월 10일 윤종원 군목이 실장으로 부임하였다. 이로 인해 2연대 군종업무가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는 김포읍의 여러 민간교회 성가대를 초청하여 예배를 드렸으므로 주일예배는 한층 더 은혜롭게 진행되었다. 김포읍의 여러 교회들과의 연합행사가 빈번하고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그는 김포반도와 강화도 전역에 산재한 OP, 막사, 초소 등을 방문하여 모든 장병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곤 하였다. 또한 민간 합창단을 인솔하여 전방위문을 실시하였고, 때로는 김포군 부인회의 협조로 대원들의 옷을 세탁해 주기도 했다.

1958년 9월 2연대는 상륙훈련차 1연대와 진지를 교대하고 포항으로 이동하였다. 포항에서는 분산되었던 병력이 교육을 위해 한곳으로 밀집되었으므로 군목업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1연대가 사용하던 교회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주일 낮예배와 밤예배가 실시되었고 주간예배도 드리게 되었다. 매 예배 때마다 평균 150명의 교인이 모이게 되었다. 윤종원 군목은 아가페 보육원의 주일예배도 인도했고, 여러차례 포항방송국 방송에 편성된 종교 시간에 설교를 했다. 1959년 5월부터는 2연대가 3연대가 합동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3연대가 상륙훈련을 하기 위해 포항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다른 군종업무도 계속 진행되었다. 도의교육은 매주 실시되었고 내무실 방문도 그치지 않았다. 전역식에는 의례적으로 축도가 있었으므로 그는 성심껏 전역자들을 축복하여 내보냈다.

1959년 9월 7일 정일선 군목이 실장으로 부임하였다. 연합예배가 계속되었으므로 교회의 예배공간은 항상 가득 채워졌다. 도의교육은 작전계획에 의해 주로 중대별 주 2~4회 실시하였으나 때로는 대대 단위로도 실시했다.

1960년 7월 20일 2연대가 휴전선 방어를 위해 다시 김포지구로 이동하여 1연대와 진지교대를 하였다. 오리정 연대본부교회에서 주일예배와 주간예배가 실시되었다. 전방 OP, 막사, 초소 방문이 주기적으로 행해졌고 도의교육도 작명에 의해 실시되었다. 성탄절과 연말에는 서울시내 교회 성가대와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의 전방방문을 주선하여 전방 장병들을 위문하였으며 기타 여러 가지 군종업무를 하였다.

당시 전방대대에는 2명의 해병군목인 김상모, 임병주 군목이 배속되어 있었다. 임병주 군목은 1연대 1대대 군목이고 김상모 군목은 1연대 2대대 군목이었으나 2연대와 1연대가 진지 교대를 하면서 그들은 잔류해서 각각 2연대 전방대대의 군목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특히 임병주 군목은 이를 계기로 대대장의 적극적 협조를 얻어 흙벽돌로 20여 평의 아담한 전방교회를 세웠다.

또 다시 연대 자체적으로 3대대와 2대대의 전방 진지 교대를 하였으며 임병주 군목은 그대로 잔류하여 3대대 군목이 되었고 김상모 군목은 진해로 전속되었다. 1961년 4월 1일 이 지역을 떠날 때까지 임명주 군목은 이 교회를 섬겼다. 그는 전방 각 OP, 초소, 막사를 일일이 방문하여 교육과 전도와 개인상담과 권면에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약 2년간 이곳 최전방에서 군목생활을 했으므로 그의 풍부한 경험은 모든 군목업무를 훌륭하게 매듭짓게 했다.

- 해병보급정비단교회
해병보급정비단교회는 해병진해기지교회에 통합되기 전까지 하나의 훌륭한 독립교회였다. 이 교회는 손홍수 군목에 의해 창설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진해시 속천 부두에서 해병보급정비단이 발족하자 손홍수 군목은 5월 28일 이 부대 군목으로 부임하였다.

교회창설을 위해 그는 여러 면에서 노력했다. 보급정비단 자체가 창설 단계였으므로 예배장소조차 마련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분주하고 메마른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식당과 연병장의 흙바닥을 예배장소로 사용하였다.

1954년 8월 해병보급단이 마산시에 있는 예전의 미 해병대 보급창으로 이동하면서 교회의 사정이 호전되었다. 이곳에는 미 해병들이 사용하던 퀀셋 2동으로 조립하여 완비된 교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휘관 방침이 교회부흥에 큰 뒷받침이 되었다. 당시 보급창장 오명 부대장은 손홍수 군목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독실한 신자로서 물자를 취급하는 장병들의 마음 자세를 신앙심으로 올바르게 잡았다. 그는 신앙이 정의로운 생활의 바탕이 된다는 것을 확신한 지휘관이었다. 또한 부산시의 모든 민간교회의 지원도 그치지 않았다.

이 교회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했다. 매주일 250여 명의 신자들이 교회를 가득 채워 민간교회 성가대의 지원으로 성대히 예배를 드렸다. 교회의 특별행사 시에는 시내 각 학교를 비롯하여 고아원과 유치원 원아들도 참석해서 다채로운 행사를 하였다. 이 교회는 해군 해병대의 모든 교회 중에서 가장 화기애애한 교회로 칭찬을 받았다. 군목은 교회의 리더가 될 뿐만 아니라 장병들의 정신적인 지도자가 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그는 정훈관 업무까지 겸무하게 되었다.

1955년 9월 작전상 해병보급단이 다시 진해 속천 부대 근방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우선 교회를 먼저 세우고’가 부대장의 방침이었다. 이 방침에 따라 마산교회가 그대로 이동해서 교회가 보다 훌륭하고 아담하게 세워졌다. 1955년 6월 18일 해군군종감 인광식 군목을 비롯한 내외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이 교회의 헌당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와 함께 오명복 대령 외 3명에게 세례가 베풀어져서 이 헌당식은 더욱 의미가 있었다.

1955년 신호섭 군목이 2대 실장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곧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해병대사령부 군종감실에서 행정적으로 이 교회를 해병교육단에 병합시켰던 것이다. 이로 인해 교회건물은 내무실로 전용되고 교회내부의 모든 시설과 비품은 사령부 신축교회로 옮겨지게 되었다. 따라서 이 교회 교인들은 10월 첫 주일부터 교육단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로 인해 100여 명에 달하는 교인을 20여 명 정도로 줄이게 되었고 재미있게 운영되던 주일학교도 문을 닫게 되었다.

1956년 5월 19일 신현균 군목이 제3대 실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약 5개월간 교육단 군목의 보좌관을 겸무하였다. 1957년 9월 신현균 군목의 후임으로 정일선 군목이 제4대 실장으로 부임했다. 정일선 군목은 이 부대가 초임지였으므로 힘과 정열을 이곳에 쏟아부었다. 그는 보급정비단 회의실을 예배장소로 해서 주일예배와 주간예배를 재개하였다. 그는 교회재건에 온 힘을 쏟았다. 정기적으로 장병 도의교육도 했다.

1958년 12월 9일 권수복 군목이 제5대 실장으로 부임했다. 그의 부임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59년 2월 1일 해병 편명에 의해 해병 교육단과 보급정비단이 통합되어 해병진해기지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해병보급단교회는 다시 진해해병기지교회로 통합되었다. 이로 인해 보급정비단의 단독 군종업무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 상남훈련대교회
해병교육단 상남훈련대는 진해에서 약 10Km 떨어진 창원군 상남면 야산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은 해병들이 야산에서 전투훈련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신병, 부사관, 사관후보생, 장교들이 일정한 기간 동안 이곳에 주둔하면서 주야를 가리지 않고 훈련에 전념해서 전투력을 배양하였다. 따라서 이곳은 다른 어느 곳보다 군종업무가 절실하게 필요한 곳이었다. 지리적으로 산간벽지에 격리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야를 가리지 않는 맹렬한 교육훈련은 모든 장병에게 많은 문제성을 제기하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침투했다. 역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부름을 받은 말씀의 봉사자들의 반응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교회가 세워지기 마련이다. 이동환 군목은 1958년 12월 해병 진해기지교회의 보좌관으로 부임하였다. 그 이후 주일에는 이 훈련대에 와서 모든 장병들, 특히 신병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곤 하였다. 그가 전적으로 이 훈련대에 파견된 것은 1956년 6월이었다. 이곳은 그가 군목으로 부름을 받은 이후 마지막으로 책임을 맡은 실무부대였다. 그는 개척의 역군으로 교회를 세워갔다. 주일예배와 주간예배가 강당에서 실시되었다. 도의 교육을 비롯한 기타 여러 가지 군목업무가 활발하게 실시되었다. 그의 활동은 그들의 영혼 뿐만 아니라 고달픈 심신에 많은 위로와 격려와 기쁨을 주었다.

1959년 9월 초 박종열 군목이 제2대 파견관으로 부임하였다. 전임자가 개척해 놓은 기반 위에서 모든 군목업무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특히 개인상담은 그의 업무 중에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곳은 개인상담의 양과 내용의 다양성이 다른 곳에 비해 월등하게 많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힘이 닿는 한 성의껏 그들의 문제를 다루어주었다.

1960년 신종선 군목이 제3대 파견관으로 이곳에 부임하였다. 그에 의해 모든 군목업무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는 도의교육에 비중을 두고 그곳에서 군목업무를 하였다. 특히 사관후보생에게 주기적으로 실시한 도의교육은 그들의 정신적 좌표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산간벽지에 갇혀 있는 그들을 위해 도서실을 마련하였다. 해군본부 군종감실에서 배당받은 백여 권의 교양서적을 기간으로 도서실의 문을 열게 되었다. 그 후 많은 도서가 개인과 단체로부터 기증되어 도서관이 발전해 나갔다. 하지만 군목의 철수 이후 관리 불충분으로 모든 도서가 분실된 것은 애석한 일이었다.

신종선 군목이 1961년 3월에 전출간 이후 해병진해기지교회는 군목 부족으로 이곳에  군목을 파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지교회의 보좌관 백수현 군목이 수개월간 주일예배를 인도하면서 간헐적으로 군종업무를 해 나갔다.


ㅇ제1상륙사단교회

- 제1여단교회의 창설
1953년 2월 10일 서부전선 금촌 지구에서 제1여단이 창설되었다. 유영근 군목이 상부의 명을 받고 이 부대에 부임한 날자는 휴전협정이 성립된 다음 해인 1954년 2월 9일이다. 그는 3개월 정도 근무했지만 교회창설의 위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1954년 2월 14일 주일 111명의 교인이 모인 가운데 제1여단 교회 창설예배가 드려졌다. 교회가 여단본부의 전망이 좋은 위치에 천막으로 세워졌다. 이어서 4월 23일부터 29일까지 대광고등학교 교목 유응기 목사의 부흥회가 이 교회에서 실시되었다. 이 집회로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오게 된 것은 하나님께 큰 영광이었다.

1954년 5월 20일 박장원 군목이 제2대 실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천막교회를 헐고 교회를 신축하려고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다. 마침내 1954년 11월 17일 돌담 반 목조식 교회가 착공되었다. 이 신축교회는 같은 해 12월 26일 크리스마스를 기해 헌당되었다. 그 이후 이 새 교회의 예배는 금촌장로교회 성가대의 도움으로 더욱 은혜스럽고 경건하게 드려지게 되었다.

- 제1상륙사단교회로 발전
1955년 1월 15일 해병 제1여단은 해병 제1상륙사단으로 증편되었고, 교회도 제1상륙사단교회로 명명되었다. 제1여단교회를 신축했던 박장원 군목은 1955년 3월 15일 이임하고 박창선 군목이 그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박창선 군목은 부임 후 곧 부대 인접 마을의 어린이를 위해 어린이 교회학교를 세웠다. 그 교회학교가 불과 1년 만에 2백여 명이 모이는 큰 교회로 발전한 것은 매우 기쁜 일이었다. 이 어린 학생들로 조직된 어린이 합창단은 예하 각 대대를 위한 순회예배와 순회 위문행사시 큰 도움을 주었고, 성탄절에는 임진강 건너 미 제34연대까지 새벽송을 하였다. 그는 여러 차례의 부흥회를 실시하여 교인의 숫자를 증가시키는 한편 정기적인 집회 수를 늘여서 교회부흥을 도모했다. 주일낮예배와 밤예배, 수요일 어린이예배와 목요일 간증예배, 새벽기도회 등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 교회는 군민합동으로 140여 명의 어른과 200여 명의 어린이 교인이 모이는 큰 교회로 발전했다.

그는 의무중대와 영창을 방문해서 환자와 수감자를 위로하고 선도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러던 중 그는 인간의 귀중한 한 생명을 구하는 의미있는 일을 하게 되었다. 당시 수감 중이던 일등병조 김성섭은 그의 죄과로 봐서 사형집행을 받아야 마땅하였지만 개과천선의 여지가 있어서 박창선 군목의 따뜻한 배려로 생명을 구제받게 되었다. 다음과 같은 박창선 군목의 글에서 그 당시 김 해병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사형을 받을 해병을 위해 사선 변호인으로서 사단 법정에서 변론을 하여 3년 복역으로 자유인이 된 김 해병을 그후 진해에서 면목도 당당한 신자로 대하게 되었다. 그는 미결수로 사단 영창에 1년을 머무는 동안 변하여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다. (중략) 오직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잘못한 그의 과오를 통하여 터져나오는 눈물과 탄식을 제하고는 그의 전 생애는 새로운 소망과 영생의 길을 찾으므로 그저 즐거움과 기쁨만이 그의 전 소유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신앙으로 인하여 받는 용기와 희열에 동참하여 마침내 1년 동안에 수 백명의 형우들의 영을 바른 길로 인도하였다. 나의 눈에는 그때 김 해병의 창백한 얼굴에 가득히 차있는 희열과 평강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 무렵 손홍수 군목은 보좌관으로 박창선 군목을 돕고 있었다. 그는 1955년 9월 30일 부임해서 1956년 2월 4일까지 근무하였으며 예하 6개 독립중대를 순방하면서 예배와 교육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사단지구 일대를 돌아 다니면서 대민관계를 원만하게 맺었다. 문산 고아원과 대원리 보육원 창립을 위해 협조하는 한편 금촌감리교회, 등원리교회, 문산교회, 벽제교회와의 유대도 긴밀하게 해 나갔다.

박창선 군목 후임으로 전덕성 군목이 부임하였다. 이 두 명의 군목이 이·취임하는 사이에 약 4개월의 공백이 있었다. 그는 사단 군종참모가 아니라 보좌관으로 부임하여 신교담당 군목이 되었다. 김동한 선임군종장교(중령)가 참모로 부임하여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덕성 군목은 1956년 10월 8일 부임해서 1957년 4월 13일까지 약 5개월 동안 이 교회를 섬겼다. 전덕성 군목은 1957년 2월 21일 이적죄로 사형언도를 받고 사형집행을 당한 양재명을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하였고 임종하는 길에 소망을 가지고 마지막 여정을 가도록 인도하였다. 간첩 양재명은 죽는 최후의 순간에 자기와 같은 과오를 범하거나 유혹에 빠지는 전우가 없기를 유언하고 마지막으로 세례를 받았다. 전덕성 군목은 우방군(友邦軍) 군목과도 유대를 가졌으며, 미 제1기갑사단 우드 군목은 신약성경 1천 부를 기증하며 업무 협조를 하였다.

전덕성 군목 후임으로 김덕순 군목이 부임했다. 그는 1957년 4월 18일 부임해서 그해 7월까지 약 3개월 동안 이 교회를 섬겼다. 이 두 명의 군목재임 시 교회의 운영과 군종 업무는 예전과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특히 이들은 군목의 인원부족으로 군목이 배치되지 않은 예하 1연대, 2연대, 11연대를 정기적으로 순방하여 예배를 드리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판문점 근방에 주둔한 미군부대의 한국인 종업원들이 모이는 평화촌교회에까지 나아가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 특히 활동성있는 사단지구의 기독장교회를 위해서 그들은 시간을 할당해야 했다. 당시 해병대 기독장교회의 창설자 문희석 대령이 사단 작전참모로 있었으므로 이 모임이 매우 활동적이었다.

1957년 7월 6일 한기원 군목이 김덕순 군목의 후임으로 부임했다. 그는 여러 가지 측면으로 군종 업무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 1958년 10월 낡은 교회를 헐고 새로운 교회를 착공케 했다. 이 교회는 피라미드 식으로 설계한 현대감각의 40여 평 건물이었다. 외부의 지원없이 순수하게 군수물자와 병력의 노동력으로 교회를 건축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 교회는 사단장 이하 각 참모의 적극적 협조로 착공 3개월 만인 그 해 12월 25일에 준공하였다. 이 교회는 마치 산 위의 성처럼 부대 중앙의 능선지대에 우뚝 솟아 올랐다. 이 사단 교회의 모습은 해병대에 복음선교의 기치를 다시 한번 높이 들어서 그 전진을 재 확인하는 상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해병대는 불행하게도 이 교회를 오랫동안 사용하지 못했다. 작명에 의해 해병 제1사단이 진지를 육군 제1전투단에게 인계하고 상륙훈련차 포항으로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교회를 ‘해병대주둔기념예배당’으로 명명하여 군민교회 대표들에게 인계하게 된 것은 떠나는 자의 섭섭함을 다소라도 위로하는 점에 있어서 의미있는 일이었다. 이 교회의 대지는 군이 징발한 개인 소유였다. 따라서 한기원 군목은 사단장의 배려로 이 대지를 지주로부터 매입하여 완전한 교회로서 인수했던 것이었다.

- 포항 사단교회의 발족
1959년 3월 12일 해병 제1상륙사단이 포항으로 부대이동을 완료였다. 한기원 군목은 곧 포항기지사령부교회와 군종실의 위치를 정하고 기지사령부 군종참모를 겸무하면서 사단 전반에 걸쳐 군종업무를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모든 예배는 기지교회에서 기지와 사단 합동을 실시되었다. 주일낮예배와 밤예배, 주간예배가 정기적으로 실시되었고 평균 50~60명의 교인이 모였다. 그러나 사단 예하 8개 대대가 다른 부대와 같이 포항기지 전역에 산재해 있었으므로 군종업무의 편의상 이 지역을 제1교회 지역, 제2교회 지역, 제3교회 지역 등으로 분할하였다. 제1교회는 사단과 기타 교인, 제2교회는 11연대와 전차대대와 공병대대, 제3교회에는 3연대와 수송대대와 의무대대 교인들이 주로 참석하였다. 제1교회와 제2교회는 이미 세워져 있던 교회였지만 제3교회는 11연대에서 새로 마련한 것이었다.

도의교육은 예하 8개 대대(본부, 근무, 의무, 공병, LVT, 전차, 수송, 해안)에 월 평균 1회씩 순회 실시했다. 도의교육을 위해서 주로 보좌관들이 수고했다.

무의탁사병 위안회는 포항에서 그의 재임기간 중 3회 실시하였다. 제 1차는 1959년 10월, 제 2차는 1960년 4월, 제 3차는 1960년 10월에 각각 실시했다. 제 1차와 제 2차는 대구시와 대구 기독교연합회의 초청으로, 제 3차는 포항시와 포항기독교연합회의 초청으로 실시했다.

군종장교의 자질 향상을 위한 군종장교회의를 월 1회 정도 실시했다. 당시 포항지역에는 항상 5~6명의 군종장교가 있어서 이들이 주기적으로 모여서 독서발표회와 업무연구 발표회를 해서 스스로 발전시켜 나간 것은 좋은 현상이었다.

한기원 군목은 영남지구 기독학생 하령회를 포항에서 개최하도록 주선함으로써 군민 간의 친선을 도모했고, 사라호 태풍으로 인한 복구사업을 위해서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주로 군 장비를 동원케 해서 안강, 강구, 영덕 일대의 교회와 구호민을 위한 원조를 했다. 당시 해병군목인 차원태, 구본웅이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들은 8개 직할 대대를 순방하면서 군종업무를 실시하는 동시에 모든 군종업무를 위해 참모를 보좌했다. 차원태 군목은 1959년 2월 20일 사단이 금촌지구에서 주둔 시 부임하여 1960년 2월 3일까지 포항에서 근무했다. 구본웅 군목은 1959년 10월 13일 포항기지사령부로 임명 받았다가 차원태 군목 이임 후 사단 보좌관까지 겸무하였으며 1961년 4월 3일에 이임했다. 포항지구 기독학생회를 중심으로 약 30명의 대원으로 해병소년합창단을 조직하여 교회의 예배를 도운 것은 그에게 있어서 기록할 만한 사항이었다.

1960년 5월 14일 박창선 군목이 한기원 군목 후임으로 부임했다. 이로서 그는 두 번째로 사단 군종참모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유능한 목회력을 발휘하여 교회를 섬겨 나갔다. 여전히 구본웅 군목이 그를 도왔다. 사정에 의해 해병소년합창단이 해체된 후 도구교회 성가대가 예배를 돕고 있었다.

박창선 군목은 1960년 10월 9일 PHIBLEX(Amphibious Landing Exercise, 상륙훈련) 기간 중 LST-816함에 승조해서 함상예배를 인도하는 등 모든 대원을 위해 군목으로서 자신의 할 일을 해나갔다. 연례적인 무연고 사병 위안회가 계속되어 130여 명의 무연고 사병이 1960년 11월 8일부터 3일 동안 대구시와 대구기독교연합회의 초청으로 대구에서 심신의 피로를 풀었다.
1961년 1월 24일 박창선 군목의 후임으로 차몽구 군목이 부임했다. 그는 가장 먼저 신자 배가운동에 전념하여 교회의 부흥을 도모했다. 많은 신자를 새로 얻게 되었다. 당시 보좌관은 박병주 군목이 있었으며 그는 1961년 4월 3일 부임해서 다음 해 9월 20일 이임하기까지 예하 대대를 순회하면서 도의교육과 상담을 비롯한 각종 군종업무를 분담했다.

1961년 2월 18일 전 사단지역 무연고자사병 위안회가 포항시와 포항 각 신문사 주최 하에 포항시 대한부인회의 후원으로 실시되었다. 1백여 명의 무연고 사병들이 따뜻한 대접을 받고 다시 한번 동포의 사랑을 피부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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